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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가 우리 조상님?


생물 | 2010/12/03 04:26 | Posted by 강석하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내가 맨 처음 수정란이었을 때 세포에 들어있는 유전부호 30억 염기쌍 중 하나가 달랐다면 지금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생겨났을까? 그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는 너무 적다고 치자. 그렇다면 열개? 백개? 천개? 어느정도 달랐다면 '나'라는 존재가 아닌 다른 사람이 태어나게 되었을까?

어찌보면 고민해서 얻을 것도 없고 답도 안 나오는 쓸데없는 상상이다. 그런데 어쩌면 '인간'을 정의내리기 위해서 비슷한 고민을 한 번쯤 해보게 만드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인간과 바이러스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에이즈를 일으키는 HIV, 감기를 일으키는 여러가지 바이러스들을 비롯해 인간은 수많은 바이러스의 위협을 받고 있다.

1970년대 까지만 하더라도 바이러스로 인해 암이 발생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었다. 그러나 인유두종바이러스, 카포시육종, 간암 등 바이러스에 의해 발생하는 암의 목록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암 이외에도 인간에게 병을 일으키지만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바이러스들이 아직 많은 것 같다.

바이러스와의 악연은 역사가 깊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바이러스는 화석을 남기는 것도 아니고, 동물이나 세균 등 세포를 가진 생물과는 달리 유전자가 너무 빨리 변해서 바이러스의 유전자에 새겨진 진화의 역사는 금새 흐려지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많은 종류의 동물 게놈이 해독되면서 과학자들은 동물 게놈에 새겨진 진화의 흔적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다양한 동물의 게놈에는 그들뿐만 아니라 공존했던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의 변형된 유전자가 담겨져 있었다. 바이러스의 화석은 숙주의 게놈에 남겨지는 것이다.

전립선암과 만성피로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XMRV나 HIV 등의 바이러스는 레트로바이러스(retrovirus)라는 종류에 속한다. 이들은 유전자를 복제할 때 자신의 유전자를 숙주의 게놈 사이에 끼워넣는 과정을 거친다. 그렇기 때문에 생식세포에 이 바이러스가 들어갔을 때에는 생식세포의 핵에 있는 DNA에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끼워져 자식의 게놈에 바이러스 유전자가 고스란히 딸려 들어갈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인간의 게놈에 레트로바이러스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위를 HERV(human endogenous retroviruse)라고 부르는데 약 10만개의 조각으로 인간 게놈의 총 8%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 게놈에 남겨진 바이러스의 화석을 이용해 바이러스를 부활시켜 연구에 사용하기도 한다. 나는 그 중 하나를 동아사이언스에 소개했었다.)

이렇게 우리 게놈에 들어있는 HERV는 대부분 아무런 기능이 없지만 일부는 다발성 경화증 같은 자가면역질환에 관련된 것으로 의심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없었다면 이 글을 쓰는 나도, 읽는 당신도 세상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HERV는 태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뿐만 아니라 태반을 갖는 포유류들은 모두 한 때 우리 조상의 적이었을 바이러스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레트로바이러스 외의 다른 종류의 바이러스들은 숙주의 DNA에 자신의 유전자를 끼워 넣지 않기 때문에 우연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숙주의 게놈에 족적을 남길 일이 없다. 그러나 지난달 PLoS Pathogens에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인간을 비롯한 포유류, 조류, 곤충 등 다양한 동물의 게놈에는 주요한 바이러스 종류들의 흔적들이 담겨져 있다.

보통은 현재의 바이러스와 숙주 관계를 맺고 있는 대로 바이러스의 화석이 들어있었지만 포유류에 감염하는 종류의 바이러스 화석이 모기나 진드기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숙주의 피를 빨아먹다가 우연히 바이러스의 유전자가 자신의 게놈에 섞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양한 숙주에서 나타나는 바이러스 화석을 이용해 현존하는 바이러스들이 언제부터 존재해왔는지도 추정해볼 수 있다. bornavirus의 화석은 코끼리와 바위너구리(hyrax), 텐렉(tenrec)이라는 고슴도치 비슷한 동물의 게놈에서 모두 발견되었다. 이 세 종류의 동물의 공통조상이 bornavirus에 감염되었다면 그 연대는 9천300만년에 이른다.

바이러스의 화석들은 바이러스의 유전자 서열이 쪼개지거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형된 형태이지만 어떤 것들은 다양한 숙주에서 거의 변화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기도 했다. 이는 무언가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 나는 다양한 생물들의 게놈을 해독하면 그 생물과 또 다른 생물들의 유전자 따위를 비교하면서 해당되는 생물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줄만 알았지 그 속에 잠자고 있던 바이러스들의 흔적을 이렇게 연구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게놈을 해독하는 데 드는 비용과 시간이 점점 감소하고 게놈이 해독되는 생물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또 어떤 새로운 연구가 가능해질지 기대된다.

다시 처음에 했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우리 인간의 게놈에서 바이러스에서 유래한 부위들을 제거하고 나면 과연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분명히 그건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인간이 원숭이의 후손이냐며 빈정거렸다. 종의 기원이 발표된 지 15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인간은 (부분적으로) 바이러스의 후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신의 세포 하나하나에 그 증거들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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