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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죽기 위해(웰 다잉) 미리부터 준비해야

김건열 전 서울대 의대 교수



김건열 전 서울대 의대 교수

안방엔 두개의 영정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돌아가신 분의 영정 사진이 아니다. 이 방의 주인인 부부 영정이다. 영정 사진엔 각각 흰 봉투가 하나씩 끼어 있다. 봉투 안에는 공증받은 유언장과 함께 또 하나의 서류가 같이 있다. 이 서류 역시 변호사가 공증했다. 서류의 제목은 ‘사전의료지시서’이다.

서류는 “맑은 정신 아래, 나의 자의적인 의사표시가 불가능해질 경우를 대비해 의사와 가족에게 본인의 소망대로 실행해 주길 바란다”는 당부의 말과 함께 조목조목 자신의 요구를 담아 놓았다.

영정의 주인공은 한국에서 존엄사의 개념을 처음 알리고, 잘 죽기 위해(웰 다잉) 미리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김건열(82·사진) 전 서울의대 교수와 그의 부인 이옥희(81)씨. 김씨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피하기 위해 유언장과 함께 이 서류를 자식들이 보기 쉽게 영정 사진에 10년 전 끼워 놓았다. 그리고 항상 자식들에게 그대로 해달라고 부탁한다.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국가 손실
환자에게도 큰 고통과 아픔 안겨
잘 죽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뇌출혈·중풍 앓던 아내 간병하다
부부가 함께 잘 죽는 방법 고민해
10년 전 ‘사전의료지시서’ 미리 써


어렵사리 부탁했다. 영정을 떼어 유리안에 끼어 있는 서류를 펴 보았다. 모두 여섯가지의 요구 사항이 인쇄돼 있다. 우선 “의식이 없어진 상태가 되더라도 기도 삽관이나 기관지 절제술, 인공기계호흡을 시행하지 말라”고 부탁했다. 일반인들이 죽기 전에 흔히 병원에서 하는 조처들이다.

둘째는 “항암 화학요법이 필요하다는 의료진의 판단이 있더라도 항암 화학요법을 시행하지 말라”는 부탁과 함께 “이는 항암 화학요법의 효과를 불신해서가 아니라 나의 연령 때문임을 이해해 달라”고 설명했다.

셋째는 “인공영양법, 혈액투석, 더 침습적인 치료술을 하지 말라”이다. 김씨는 “비록 보호자가 보기에 의식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환자는 촉각과 청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어 고통을 느끼지만 그것을 표현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넷째는 “그러나 탈수를 막고 혈압 유지를 위한 수액요법과 통증 관리와 생리기능 유지를 위한 완화요법은 희망하고, 임종 때 혈압상승제나 심장소생술을 하지 말라”고 했다. 

다섯째 요구사항은 “여기에 기술되지 않은 부분은 ‘임종환자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의료윤리지침에 따라 결정하고, 의료진과 법의 집행관은 환자로서의 나의 권리를 존중하고 지켜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마지막으로는 “이 사전의료지시서가 누구에 의해서도 변형되지 않길 원하며 법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가족에게 위임 발표한다”고 마무리했다. 본인과 가족증인, 공증인의 도장이 빼곡히 찍혀 있다.

김씨는 호흡기 질환 전문의였다. 임종하는 환자들을 수없이 보았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사가 자신이 가는 마지막 순간에 의료행위를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많은 경우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의료적, 윤리적, 법적 수용 한계를 넘어 관리되지 않고 시술되고 있다고 보았어요. 엄청난 의료비 부담은 물론이고, 보호자는 물론 환자 본인에게도 큰 고통과 아픔을 준다고 판단했어요. 아마도 지금도 전국에서는 수많은 환자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시달리고 있을 겁니다. 이는 ‘죽음 과정의 의료화’일 뿐 개인이나 국가적으로 손실입니다”고 김씨는 말한다.

10년 전부터 ‘사전의료지시서(사전의료의향서)’를 미리 쓰자는 운동을 펴온 김씨는 경기고와 서울의대 시절 학교 대표 배구선수였다. 30년 전에 금연을 하며 평생을 건강히 지내온 김씨가 죽음을 구체적으로 준비한 것은 부인 이씨 때문. 안과 전문의였던 이씨는 10년 전 뇌출혈로 중풍에 시달렸다. 부인을 간병하던 김씨는 그때부터 부부가 잘 죽는 방법을 고민했고, 함께 유언장과 사전의료지시서를 마련했다고 한다.

본인도 지난해엔 협심증을 앓아 심관상동맥 성형술을 받았다. 죽음이 그리 멀리 느껴지지 않았다.

김씨는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은 결코 ‘치료 중단’이 아니라, 질병치료와 회복에 도움이 안 되는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이라며 “사망하는 사람을 인위적, 기계적으로 그냥 숨을 쉬게 하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또 “인공호흡기를 연결한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라도 매일 볼 수 있어 좋다고 하는 보호자들의 이견이 있지만, 그것이 과연 환자를 위한 것인지 보호자 자신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의사들은 의학적으로 할 만큼 한 뒤에 최종단계에서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을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환자 가족과 진실하고 진솔한 소통이 전제돼야 한다”는 김씨는 “죽는 과정도 질병관리의 한 과정”이기에 지금부터라도 국가와 사회가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한다.

실제로 환자가 연명치료에 들어가는 순간이 되면 누구도 “계속하자” “중단하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관행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현실이기에, 미리미리 ‘사전의료지시서’를 준비하는 것이 본인의 고통을 줄이고 엄청난 의료비를 줄이는 방법이라고 다시 한번 김씨는 강조한다. 

글·사진 이길우 선임기자 nih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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